뉴 노멀 시대의 신앙(4) 꽃은 젖어도

감염병을 보통 endemic, epidemic, pandemic의 세 단계로 분류합니다. 엔데믹은 특정한 지역에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질병으로 풍토병을 말합니다. 에피데믹은 최소 2개국 이상에서 퍼져 유행하는 경우입니다. 팬데믹은 세계 대유행병으로 대륙을 뛰어 넘어 확산된 경우를 말합니다. 2020년 3월 11일 국제보건기구(WHO)는 마침내 코로나 팬데믹을 선언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코로나와 같은 극한 재난이 왔을 때 인재냐 천재지변이냐 책임론을 묻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에게는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이 재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가? 아닌가? 에 대한 물음입니다.

1755년 11월 1일 카톨릭교회의 만성절 날 신자들이 리스본 성당에 빈틈없이 모인 오전 시간, 대지진이 포르투갈 리스본을 강타했습니다. 이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며, 아름답고 화려한 성당들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당시 카톨릭 사제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반면에 어찌 리스본만이 죄악의 도시인가? 라며 반론을 펴는 사람들, 자연재해나 6,7층 건물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코로나19는 인재인가? 천재지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일까요? 존 파이퍼 목사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합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겸허히 오늘날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며 물질만능주의와 죄악으로부터 회개할 것을 말합니다. 이 때일수록 더욱 견고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 믿음에 굳건히 설 것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내게 일어나며, 교회에 일어나고, 믿음 안에 열심히 살려고 하는 성도에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에 바울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는 말씀처럼, 지금은 청동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아나,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신 것처럼 온전히 다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럼에도 코로나19와 같은 대유행병이 온 세계를 강타하는 이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무엇을 하고 계실까? 의문을 갖게 됩니다. 개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책을 통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를 보여 줍니다. 분명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처절히 외치셨습니다. 신학자 틸리히가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시고, 우리가 바라지 않음에도 고독 속으로 밀어 넣으신다”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깊은 고독의 방으로 밀어 넣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부이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The Passion of the Christ의 감독 멜 깁슨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하늘로부터 커다란 물방울 하나가 떨어뜨려 하나님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에 참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님의 고통과, 성부 하나님의 공감, 성령님의 동참이 있는 삼위일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몰트만 신학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실까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우리의 고통 가운데 십자가를 통하여 함께 느끼시고, 아파하시고 동참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연약한 자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을까? 입니다. 마치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하는 코로나 앞에 무기력한 하나님처럼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코로나보다 약한 분이실까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1:18)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패배요 죽음입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승리요 생명입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능은 세상의 힘과 권력의 전능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한 자가 되어, 고통 한 가운데에 처하시고, 느끼시고, 함께 하시는 역설의 전능이십니다. 팔복의 ‘심령이 가난해야, 애통해야, 온유해야, 주리고 목말라야, 마음이 청결해야, 화평케 해야,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아야 복’이라는 역설적인 복과 같습니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씻기며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한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도종환 시인의 <라일락 꽃>이란 시입니다. 꽃은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고, 빛깔이 지워지지 않듯이, 그 어떠한 인생의 고난과 환난 가운데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사랑이십니다. 친히 연약한 자가 되어 고통 한 가운데 계시며, 함께 고통을 느끼시며, 함께 참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어떠한 상황에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품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꽃은 비에 젖어도 향기를 발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내듯이, 코로나의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 소망, 사랑의 향기를 잃지 않으며, 영롱한 빛을 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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