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 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를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으니

 

처음 이 시를 들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라디오로부터 시를 읊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간신히 버티던 저를 향해 시인은 태연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아마 고정희 시인은 이사야서를 아는 분 같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42:1-3).

상한 갈대를 꺽지 않는 그분의 하늘 아래선 충분히 흔들려도 좋습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틸 필요도 없고, 흔들리지 않는 척 가면을 쓸 이유도 없습니다.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다.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하며 발 내딛는 거지요. 혼자인 듯 하지만 아닙니다. 시인은 저만치 구원의 손을 바라봅니다.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으니.”

(손태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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